시골

2008. 10. 21. 00:04PHotoS















어렸을 때는 시골에 가는게 마냥 좋았다.
길은 비포장이었고, 물이라도 고여있으면 차가 들썩들썩 첨벙첨벙 거렸다.

도시처럼 화려한 광고판도 없고,
저녁 8시나 9시만 되면 모두 자리에 눕기 때문에

길이라도 조금 막혀서 늦게 가면
동네는 어두컴컴했다.


뒷좌석에 타서 차 앞을 바라보면
노란색 자동차 라이트등 사이로 검은 공간에는
정말 뭐라도 나올 수 있는 곳이었다.


이따금 흰 비닐봉지라도 비치면
아빠는 자기가 어렸을 때 장에 걸어다니면서
귀신도 만났고, 호랑이 울음소리도 들었다고 했다.


항상 동네 언저리 즈음에 할아버지께서 마중을 나오셨고
난 할아버지한테 좋아라 매달렸다.
할아버지한테서는 약간의 오래된 담배냄새와 차가운 잠바의 시원한 감촉을 느낄 수 있었고,
할아버지는 쭈글쭈글해진 얼굴에 함박 웃음을 지으셨다.


옛 시골집에 가면,
내가 항상 가지고 싶었던 넓은 마당이 있었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과,
우물 근처에 할머니가 심은 채송화가 있었다.


작은 다리로 올라가기가 힘든 돌계단이 있었고
툇마루로 올라가는 돌계단과 부엌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의 계단 수가 달랐던 걸로 기억된다.


우리가 도착할 즈음에는
할머니는 항상 부엌에 계셨고,
부엌에 가면 아궁이 2개에 얹혀진 솥에다가
닭국이 끓고 있었다.
닭국 연기가 부엌을 자욱히 메우고,
마른 나무 타는 구수한 냄새도 났다.


부엌 한 쪽에는 장작과 갈비(솔잎 마른 것)이 가지런히 쌓여있었고,
나와 동생이 한 여름에 밤새도록 뜨겁게 불을 떼면서 놀아도 할머니는 좋아하셨다.



부엌 입구에 싱크대 겸 세면대가 있었는데,
거기서 나오는 물은 무척이나 깨끗하고 시원했다.
이빨을 닦다가 헹궈내는 물을 그냥 먹는 이상한 짓도 많이 했다.



툇마루는 좁지만, 단단했다.
오래되고 단단한 나무의 내음이 배어 있었다.
나무 사이 사이로 틈이 있어서 그 밑으로는 할아버지가 신으시는 털신이 보였다.


방은 정말로 작았지만,
어린 내가 일어서면 머리가 천장에 닿을 정도였으니까.
그 방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랑 같이 모기장을 치고 자는게 좋았다.


한 여름에 방 안에 모기장을 치고,
방문을 활짝 열어놓으면,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원시시대의 나방같은 거대한 나방이 모기장에 붙어있곤 했다.


마치 깊은 숲 속에 캠핑을 온 것만 같았다.



시골집 이불은 시원하면서도 단단한,
기분 좋은 느낌이 났다. 아마 아주 어렸을 때
할아버지 할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간직하게 된 기억이리라.



푸세식 화장실.
가는 도랑물.
집 뒤의 대나무 숲속 무언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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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한 장의 사진을 보는 순간,
이 모든 기억의 파편들이 순식간에 흘러간다.
놓치기 싫어 미친듯이 적었다.



시골이 있어서 행복하다.
그 기억을 잊지 않아 행복하다.




Contax ARIA, Planar 50mm F 1.4, Fuji Superia REALA 100
2008 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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